황재민
그림은 평평한 것이 아니라 사이 공간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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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평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림은 평평하기 때문이다. 꼭 수수께끼 같은 이 문장은 사실 지난 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담론 중 하나였다.

  1900년대 중반 활동했던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추상회화가 ‘평면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상을 섬세하게 묘사해 이야기를 빚어내고 화면 속에 깊이를 만들어 몰입하게 이끄는 사실적인 그림들은 미술이 아닌 문학의 대리물에 불과한 무엇, 단지 환영에 불과한 무엇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추상회화는 깊이라는 환영을 몰아내고 이야기를 넘어선 자신의 ‘본질’, 즉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매체 자체를 가리켜야 했다. ‘본질’로서의 그림. 이를 위해 그림은 평평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린버그의 의견은 곧 비판에 직면한다. 모든 종류의 추상회화가 ‘평면성’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목적론적이라는 논박을 피하기 어려웠다. 후일 미술사 연구자 수잔 N. 플라트는 그린버그의 비평을 면밀히 살피며, ‘그림은 평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절박함과 공포에서 나온 기획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대중문화가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소위 ‘고급문화’를 잠식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린버그는 전위적인 예술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평면성’이라는 개념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공포에 시달리는 동안에는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린버그의 비평은 이후에도 꾸준한 영향력을 가졌다. 몇 가지 결함이 있었지만, 그의 주장은 추상회화라는 전위적 예술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얼마간 유용했던 것 같다. 예컨대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추상회화를 두고 ‘대체 무얼 보아야 하냐?’고 따져 묻는 질문 앞에서 누군가는 그린버그의 말을 빌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테다. “그것이 얼마나 평평한지 보라!” 따라서 추상회화에 대한 해석은 평평한 ‘평면성’을 염두에 둔 채 줄곧 진동해 왔다.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하슬린은 평면과 입체 사이 어딘가에 놓이는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에는 층층이 쌓인 물감층이 가득한데, 이 물감층은 때로 교차하고 때로 엇갈리며 흥미로운 입체감을 만든다. 가장 위층에 놓인 물감층이 구멍 뚫려 아래에 발린 물감층을 드러낼 때, 혹은 위층의 물감층이 지나치게 얇고 투명하게 발리는 바람에 아래쪽에 깔린 물감층을 비춰 보일 때, 이처럼 복잡하게 자리 잡은 적층은 최소한의 두께를 만드는 한편 그림을 여전히 평평하게 유지한다. 정하슬린의 그림은 추상적인 것도 사실적인 것도 아닌, 평면도 입체도 아닌, 어떤 사이 공간에서 층을 쌓는다.

 정하슬린은 그림이 이미지와 물감 덩어리 사이에서 모종의 시간을 품고 있는 독특한 사물이라고 짐작한다. 얽히고 꼬이는 물감층의 미묘한 단층은 ‘사이’와 ‘시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작가는 최근 편지와 편지 봉투를 그리기 시작했다. 편지는 펼치면 온전한 평면이 되지만 발송하기 위해 접는 순간 입체가 되는 사물이다. 정하슬린이 그려낸 편지라는 정물은 평면과 입체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의 그림과 닮아 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편지가 어딘가로 전달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편지가 대개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며, 다만 예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편지가 보내는 이의 손을 떠나 받는 이에게 도착하기까지, 그것이 찢기거나 유실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예외 상황이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이며, 편지를 진실로 편지가 되게끔 해주는 것은 도착 가능성이 아니라 도착 불가능성이다. 데리다의 말마따나, 편지는 발생하는 순간 스스로 파편화되어 버리는 사물이다.

  정하슬린의 그림은 ‘평면성’과 ‘입체성’을 함께 보여주지만, 평면이 되려고 하지도 않고 입체가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이를 두텁게 부풀리기 위하여 꾸준히 물감층을 쌓을 뿐이다. 이때 그림은 편지와 같은 도착 불가능성을 환기한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착 불가능한 장소를 향해 나아가려는 그림. 어쩌면 이 그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림은 평평한 것이 아니다. 그림은 사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Haseullin Jeong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