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윤_독립큐레이터
동시대 미술과 연관된 주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부산비엔날레(2012), 아트인컬처(2012-2014), 광주 아시아문화개발원(2014), 스페이스윌링앤딜링(2017-9) 등에서 동시대 미술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영등포에 위치한 비영리 전시공간 위켄드를 공동 설립(2016), 1년간 운영했다. 공동기획한 전시로 《청춘과 잉여》(커먼센터, 2014), 《사물들: 조각적 시도》(두산갤러리, 2017)가 있으며, 기획한 전시로는 《Rules》(원앤제이 갤러리, 2016), 《Painting network》(신한갤러리 역삼, 2019), 《New Life》(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22)가 있다.
과정 안에 머무르기: 정하슬린의 작품에 관하여
정리와 청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일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청소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먼지와 머리카락을 닦으며,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청소를 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정리다. 불필요한 물건은 없애고, 또 사용할 물건들은 한 곳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새로운 물건을 들일 때는 이미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사용할 것 같은지,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컴퓨터의 바탕화면 혹은 외장하드를 정리하는 걸 생각한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시각적인 창작물을 만들 때도 이러한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은 동일하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는 매일같이 수많은 시각적 자극을 접한다. 수많은 대량생산품의 포장지를 비롯해, 전단지나 포스터 같은 광고물,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디자인, 건축, 공예 등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 얻게 되는 시각적인 인풋(input)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직접 눈으로 본 것 이외에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에서 본 것까지 다 합하면, 오늘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순수미술과 그 외의 것들을 구분하고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옛이야기다. 오히려 미술보다 극한의 자본주의적인 공간-예를 들어 최신식의 카페나 호텔-이 시각적으로 큰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창작자에게 이제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어쩌면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천으로 널려있는 소스들을 열심히 리서치하고, 그것들 중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잘 추려서, 새로운 창작의 요소로 활용하는 것 말이다.
위에 언급한 것은 글을 쓰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영상을 만드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내서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말이다. 모든 작가가 대부분 이러한 수집/정리/분류/적용의 과정을 거칠 테지만, 이러한 내용이 작업에 비교적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작가의 입을 통해서, 또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과정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정하슬린의 경우를 살펴보겠다.
모으고 추출하기
정하슬린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0. 시작 전: 작업을 하는 총 시간이 그 외 삶의 시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 1. 내가 모으는 것: 삶에서 마주친 이미지, 텍스처들을 아카이빙 한다. 2. 어디서 왔을까: 접힌 것, 수집한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한다. 3. 추출하기: 인상의 꾸러미를 만들어 회화로 내보낸다.” 이처럼 그는 모으고, 생각하며, 추출하는 과정을 통해 회화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에서 정하슬린은 작품의 제작 과정을 드로잉을 통해 소개한다. 그가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대상은 종이와 같은 납작한 형태이지만, 얇게나마 두께가 있고, 또 형태의 외곽선만으로도 누구나 쉽게 그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바로 편지 봉투다.
그는 배경색을 다르게 쓴다던가, 일부러 일부분을 칠하지 않고 남겨놓는 등의 방식을 이용해 새로운 레이어가 쌓이기 이전의 시간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그림에 남겨놓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서를 발견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재료에 대한 이해가 높은 소수의 적극적인 관객에 국한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함께 출품되는 드로잉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여러 레이어를 따로 떼어놓고 보니,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의 경험이 떠오른다. 여러 층이 층층이 쌓여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같은 도록 정하슬린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자연광을 마주하는 시간보다는 액정스크린 뒤에서 비추는 빛-대상 뒤에서 전면적으로 일정하게 비추는 빛을 마주하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이제는 오히려 자연광이 어색하고 극적으로 느껴질 정도죠.” 그의 작품에서 우린 명백히 자연광이 아닌, 액정스크린 뒤의 일정한 빛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다.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 역시 평평한 2차원의 화면으로서의 감각을 더욱 강조한다. 구상(figuration)과 추상(abstraction) 그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것도 정하슬린이 사용하는 빛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부분은 실크스크린을 이용하여 찍어내기도 해서인지 분명 그의 작품에서 컴퓨터상의 프로그램으로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만지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격자무늬(grid) 역시 비슷한 효과를 자아낸다. 그러나 정하슬린의 회화 작품은 재료의 질감이 화면 위에 굴곡을 만들어내며, 즉흥적으로 끊임없이 더해지는 붓질과 실제 재료가 쌓이면서 발생하는 예상하지 못한 화음이 캔버스 위에서 펼쳐지며, 독자적 특성을 드러낸다.
20세기 중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형식주의 이론이 미술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자기비판을 통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였다면, 2022년의 회화는 순수성, 혹은 고유성을 탈피하기 위한 시도들로 가득하다. 정하슬린의 작품 역시 자수(embroidery),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디지털 드로잉, 공예(craft), 프린트 등 다양한 소스를 활용하여, 순수한 회화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미술과 일상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가 모으는 대상은 일상에서 채집할 수 있는 것들이고 그것이 작품에 활용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좀 더 쉽게 이해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시간을 품은 회화
씨실과 날실은 각각 가로, 세로로 짜여지는 실이다.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옷감(textile)을 만들어낸다. 회화도 마찬가지로 여러 레이어가 쌓이면서 화면에 깊이가 만들어지고, 여러 층위의 시간이 하나로 압축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안에서 서로 간섭하는 색, 이전 시간의 흔적 등을 살피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인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한 점의 회화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작품이 제작되기 이전의 자료 수집, 편집, 추출의 시간이 소요되며, 그 이후에는 실제 재료들로 그것을 구현하는 시간이 든다. 전시의 형태로 관객을 만나게 되면 그것을 처음 보게 되는 사람들이 그 이전의 시간들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하고, 또 완전히 무시하면서 새로운 이해의 서사를 써 내려가기도 한다. 이렇듯 회화는 만드는 사람에게도 또 보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소화해낼 시간이 필요하다. 찰나의 순간,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전시장에서의 발걸음을 쉬이 옮기지 않는 대신, 정하슬린의 작품이 담은 시간들을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