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영
무엇은 말이 되고, 무엇은 말이 안 되는지, 왜 그렇게 되는지 궁금하다. 행동하는 말을 보는 게 좋아서 읽고 쓴다. 종종 편집자, 목격자, 기록자로 일한다. 강동호와 2인전 《Tent and Grave》(Keep in Touch Seoul, 2021)을 열었고, 곽소진 작가의 전시 도록  『검은 새 검은색』(S2, 2021)에 「백지에서」라는 글을 실었다.


그리고 주고받은 이야기: 투명한 겹

나는 종종 글을 쓴다. 이런저런 글을 읽고 고치는 일을 한다. 조금 무심한 사람들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며, 그림 그리는 정하슬린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 정하슬린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이 관계에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나는 정하슬린에 대해, 특히 그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인가 대화 중에 “지나간 일을 잘 잊어버리는 편이야”라고 말하던 정하슬린이 떠오른다.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군” 나는 그렇게 대꾸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런 정하슬린의 회화는 어떤 장면의 이면을, 장면 안의 단면들을 추적하게 만든다. 그가 그려내는 캔버스 속 장면은 하나의 컷(cut),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여러 겹의 사건들이 중첩된 시퀀스(sequence), 문장의 배치 및 조합에 따라 생겨나는 플롯(plot)에 가깝다. 한 화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갖가지 층위들. 그 겹들은 어떤 패턴, 색, 기법으로 인해 서로 구별되는 동시에 서로에게 침투하는데, 이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복잡하거나 번거롭지 않다. 오히려 산뜻하고 즐겁다. 그림 속 층들이 모종의 투명함으로 존재하며 그 장면의 목적을⎯형상을 직조하는 동시에 형상에서 멀어지게 만들기⎯우회하지 않고 명쾌하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에 집중하게 만들기. 뒤돌아보는 방식의 회고가 아닌, 현재를 직면하고 현재의 갈래를 면밀히 헤아리는 방식의 회고.

나에게 정하슬린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내재한 수많은 겹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사람. 어느 날 작업실에 놀러 갔다가 그가 그린 수많은 편지 봉투를 보았다. 해체한 편지 봉투 조각에 시를 쓰고 그것을 꽃의 일부, 몽당연필 등과 함께 지인에게 보냈던 에밀리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이 떠올랐다. 정하슬린의 작업 방식과 맞닿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정하슬린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고, 그는 평소처럼 덤덤히 답해 주었다. 그 대화를 여기 옮겨 둔다.

소영. 슬린은 평소 꽃꽂이, 요리, 위빙(weaving), 디자인 등 관심을 두는 분야도, 잘하는 것도 많다. 그런데도 특히 회화를 주(主) 매체로 선택하고 작업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슬린이 그리는 수많은 겹을 2차원 평면에 표현하려면 수고롭지 않나?

슬린. 수고롭긴 하다. 그러나 회화는 비교적 타 매체에 비해 레이어를 쌓기 쉽고, 그 과정을 드러내기도 쉬운 편이다. 또한 원하는 색과 질감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위빙은 실 자체로도 물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미지와 물질 사이에서 실험하기 어렵고, 그 위에 다른 층을 쌓기도 까다롭다. 아이패드나 포토샵으로 작업한 디지털 이미지는 과정에서 레이어를 쌓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인쇄한 결과물에는 레이어가 잘 드러나지 않고 한 층으로 압축되어 버리거나 예상과는 다른 색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삶에서 마주친 이미지들을 채집하고, 내적 아카이브에 길게 머문 것들을 엮어서 전달하고 싶다. 그렇게 모으고 선별한 것들을 이미지와 물질, 과정과 결과 사이에서 표현하기 적합한 매체가 회화라고 생각했다.

소영. 제목은 어떻게 정하는가? 작업에서 제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궁금했다. 처음 캔버스를 마주했을 때 단번에 해석되지 않던 각각의 패턴들이 제목과 만나면서 순간적으로 서로 투명도를 조절하며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슬린. 그림이 추상과 구상 사이에 있다 보니 제목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아리송한 제목도, 너무 확정적인 제목도 피하려고 한다. 보통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 제목을 짓는데, 그림을 볼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무엇일지 상상한 뒤 떠오른 단어들을 조합한다. 예를 들어 물감이 튄 흔적이라면, 그 질감을 요리 위에 흩뿌려진 소스와 연결 짓거나 흔적 아래에 있는 물감층을 케이크 시트에 비유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와 언어가 만나는 지점을 조절해서 사람들이 그림 앞에 오래 머무르도록 한다.

소영. 준비 중인 전시 제목 《Combination!: 컬렉션과 아카이브》이 평소 작업과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슬린이 생각하는 컬렉션과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전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슬린. 나는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내기보다는, 내가 일상에서 마주친, 내 안에 남아 있는 인상들을 조합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고 수집한 것들이 아카이브라면, 그렇게 모인 아카이브에서 분류하고 매개하여 새로 꾸려 낸 것을 컬렉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컬렉션은 내 바깥으로 꺼내어 다른 이에게 전달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요소들을 담은 개별 작업 하나하나가 컬렉션인 동시에, 전시에서 각각의 컬렉션이 어떤 순서, 어떤 관계, 어떤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되었느냐에 따라 더 큰 범주의 컬렉션으로 완성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카이브의 결과물인 컬렉션뿐만 아니라, 과정 자체인 아카이브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가 무엇인지, 그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의 물성으로 변환되었는지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도록 했다.

소영. 나는 슬린의 그림 앞에서, 섬세한 손으로 포장한 편지와 선물 꾸러미를 떠올리곤 한다. 아니면 공들여 플레이팅 한 요리. 이런 감각은 슬린의 작업 방식 혹은 의도와 맞닿는 지점이 있는가?

슬린. 내가 다루는 지지체 위에는 여러 질감, 색감, 무늬가 담긴다. 그리고 그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도록, 어떤 순서로 담겨 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단서를 남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러’ 개가 지지체 위에 어떠한 ‘순서’로 모여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담았는지, 어떤 것을 그렸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다시 생각하면 내가 그동안 그렸던 모든 캔버스는 편지였다. 보고 들은 것, 발견된 것, 여러 카테고리에 모아 놓은 것들을 엮어 그렸다. 항상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을 상상했다. 내가 작업하면서 겪은 순차와는 다른 순서를 느끼며 이 작업을 바라볼 누군가의 해석이 궁금했다. 그리고 순차들에 대한 단서를 남겨 놔 처음과 끝이 없도록, 부분에 집중했다가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순환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소영. 어떤 방식으로 단서를 남기는가?

슬린. 단서는 대부분 차이를 극대화한 것에서 나타난다. 하얀색 바탕과 초록색 바탕 위에 올라간 색상의 차이, 건식 재료와 습식 재료의 질감 차이, 캔버스 위에 올라간 투명한 필름으로 인해 보이는 바탕의 색 변화, 크기가 큰 바탕 위에 올라간 작은 그림, 실크스크린으로 얇게 발린 한 겹의 표면과 물감 그 자체로 올라가는 두꺼운 표면의 단차, 가운데를 잘라 냈더니 프레임이 되어버린 여백들 등등.

소영. 시간이나 순서를 어떤 방식으로 감각하는가? 늘 슬린이 무언가를 뒤돌아보지 않고도 회고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슬린. 다른 작가들의 회화를 보거나, 건축물에 갈 때도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그럴 때면 과거와 미래는 선형적이고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 조각조각 잘려 도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린 그림 앞에서 사람들도 그런 감각을 전달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없는 새로운 것을 그려내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매개하는 것,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 그 과정을 추적하고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동시대 회화의 역할이라는 생각도 든다.




©Haseullin Jeong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