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_작가 /밀푀유 타임라인
태피스트리의 뒷면
«Lorem Ipsum»_ Keep in Touch Seoul / 6월 10일 - 6월 24일
"표준 채우기 텍스트"를 가리키는 로렘 입숨(Lorem ipsum)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어감을 가져 호기심 을 유발하지만,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단어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단어 자체가 완전하게 텅 비어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적인 내용이 채워지기 이전에 화면과 지면을 채우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것처럼 '로렘 입숨'은 뜻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과, 소리, 꼴 그 자체를 지칭 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되는 정하슬린의 회화 작업 앞에서는 해석의 여정이 좀처럼 펼쳐지지 않지만 물감의 텍스쳐, 온도가 다른 색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 바탕과 바탕이 아닌 것이 화면 속에서 도드라지며 모습들을 뽐낸다.
얼룩무늬 개 Spotted Dog, 오렌지색 고명Orange Garnish,케익 그자체Cake itself 등 작품에 붙여진 제목은 그려진 것의 즉물적 상태(The literal)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려진 것들의 텍스쳐와 무늬 컬러를 바라보다 보면 그 무심함은 흩어진다.
정하슬린은 물질과 이미지 사이의 상태인 회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한 믿음은 그리기 과정을 조밀하게 계획하는 일에 힘쓰게 한다. 작가는 작업을 준비할 때 참조할 이미지를 정하는데, 여기서 선택 된 이미지는 자신이 관찰하거나 상상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 한 번 그림(Picture)이 된 적이 있는 요리 책의 삽화나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 그림, 태피스트리의 무늬 같은 것들이다.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캔버스에 옮기기 직전에 작가는 물질적인 기반을 구성할 꾸러미를 만들고 결과를 예측하는 스코어링 과정을 거친다.
첫 단계는 선택한 그림을 단 몇 개의 색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컴퓨터 프로그램의 'Coloring Paper' 변환 효과를 이용하여 그림을 단순화시키고 면을 나누는 일이다. 이들은 이미 색이 채워진 색칠 놀이의 칸들처럼 변환이 되어 그들이 참조되었음을 잊지 않게 할 정도로 남게 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이 채워진 칸들을 비워내고 새롭게 채우기 위해 화면에 채워지는 순서와 방식을 정한다. 채워냄은 물감의 색, 텍스쳐, 패턴에 영향을 받는데 이 요소들은 각각 무엇을 뽐내게 할 지 선택하는 일, 두께와 공간감의 착시를 일으 키는 일, 참조 이미지에서 나오는 필연성과 연결된다. 이처럼 선택, 변환, 재구성의 단계를 거치면 작가 는 그려질 회화 작품을 어느 정도 예측하게 된다.
예측의 단계에서 만들어진 이 스코어 이미지는 물감과 미디엄 그리고 캔버스에 옮겨지는 실질적인 과정 에서 필연적으로 수정된다. 물감의 농밀함, 발색, 보조제와의 혼합 등 그리기의 물리적 단계는 기대와는 바른 결과물을 가져다 준다. 물감을 한 단계 쌓은 뒤 그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예측된 이미지와 캔버스 위에 쌓인 물감들의 층과 색상 간의 단차를 비교하고 조정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만드는 스코어 는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악보와 같은 것이 아닌 매번 갱신되며 완성되는 유동성을 가지는 스코어가 된다. 행동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스코어가 아니라 수정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이 스코어의 독특함은 페인팅의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질과 이미지 상태 사이의 운동감을 유발하는 물리적인 층 을 레이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레이어들은 수정된 스코어를 통해 완성된 빗나간 사건의 흔적이다.
그리고 제목은 여기서 작가의 회화 작품에 참조가 되는 태피스트리를 짜는 일을 떠올려보자. 색색깔의 실을 짜넣어 그림을 엮어낸 사물인 태피스트리는 풀어헤쳐진 채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느슨한 양모 실, 약간은 거칠고 묵직한 실 등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엮인 직물이다. 짜임의 방식은 매번 다를 것이다. 실들이 가진 질감은 무늬와 색, 면을 채우며 그림이 되어간다.
작가의 회화 작품에 종종 참조되는 태피스트리를 짜는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색색깔의 실을 짜 넣어 그림을 엮어낸 사물인 태피스트리는 여러 종류와 색깔의 실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엮인 직물이다. 털 뭉텅이에 불과한 씨실이 팽팽한 날실에 순서에 맞게 교차하면 어느새 완결된 그림이 만들어진다. 실에서 그림이 되어버린 태피스트리의 앞면의 재료의 특징, 그림의 속성, 장식적 기능 세 가지를 얻었다. 그렇다 면 동시에 조금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태피스트리의 뒷면을 보는 일을 무엇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태피스트리의 뒷면은 앞면의 뒤집히고 헝클어진 상이지만 앞면보다 짜인 순서를 더 잘 보여준다. 이것은 장식적 기능, 해석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보다는 물리적 속성과 함께 그것이 구성된 단계를 품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물감과 이미지 사이에 놓여있는 회화 작품이 시간을 품고 있다고 믿는 작가는, 관객이 자신의 믿음을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마음을 쓴다. 여러 시간이 교차하지만 하나의 모습으로, 정지된 상태를 뽐내고 있는 물감들의 층. 이 층들을 눈으로 관찰하고 그 순서를 따라하는 일은 그려진 순서와 눈에 보이는 것 사이의 매듭을 엮어내고 풀어내는 시간을 관객이 경험하는 것이다. 눈이 작품을 따라가는 동안 생기는 고유한 시간. 태피스트리의 뒷면을 상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