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현 _ 독립 큐레이터
우리는 어떠한 대상이 '재현'되어있지 않는 회화를 마주할 때면, 관습적으로 추상회화라는 단어를 입력해버리곤 한다. 그렇게 정하슬린 작가의 회화를 바라본다면 이 작품들 역시 추상의 자장 안 어딘가에서 해석되고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의 사실적 재현이 아닌 순수한 점.선.면. 색에 의한 표현을 목표로 하는 그림"이라는 추상화의 정의에 비추어 그의 작품을 읽어내는 것이 온당할까? 정하슬린의 회화를 그저 추상의 범주로 단정 지어버리기에는 어딘가 조금 어긋나 있는 듯 보인다.
그의 회화는 구체적 대상 혹은 익명의 이미지 (found image)를 해체- 재조합한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케이크와 웅덩이에서 출발한다. (1) 대상이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 다층적 화면을 구축해내기 위해 작가는 참조물의 형태를 회화적으로 '재현'하기 보다는 '변용'의 과정을 선택한다. 먼저, 툴을 이용해 이미지의 색을 날려버리고 테두리만 남겨 일종의 색칠공부도안과 같은 상태로 남겨둔다. 그리고 그림에 많이 쓰이는 그리드,체크,물결 등의 패턴으로 레이어를 쌓아 올리고 이후 뿌리기, 흘리기,올리기 등의 기법을 활용해 화면 안에 다른 질감(texture)의 내적 구조를 갖춘 회화적 공간을 형성한다. 다음 레이어를 올리기 전, 일종의 '단서'와 같은 부분으로서 드러낼 곳과 가릴 부분을 결정하고 오일을 짙게 섞은 (반)투명 미디엄으로 덮는 둥 마는 둥 칠을 올린다. 색 선택에 있어서는 어떠한 '분위기'를 생성하는 조합보다는 디지털상에서는 감각할 수 없는 색, CMYK 색상표 안에서 '별색'(Spot Color)에 해당하는 진하고 강한 색감을 고른다. 이는 다음에 올릴 레이어에 적당히 비치는 동시에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색을 만들어내는, 즉 레이어들끼리 간섭하며 어느정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해내기 위한 의도이다. 이러한 레이어링이 더해질수록 화면은 각 층이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고 더욱 더 서로를 디디고 지지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회화는 이미지와 물감 덩어리 사이 공간에서 시간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있어서 화면 속 이미지가 무엇으로 읽히는지, 몇 겹의 레이어를 올려야 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이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이것이 표지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직전, 그러니까 이미지가 언어에 가닿아 의미가 생성되기 전 "이게 뭐지?"하고 바라보는 그 시간까지가 중요할 뿐이다. 화면을 살피다 보면 포착되는 단서들-투명 레이어와 캔버스 옆면 등- 은 이전의 레이어를 유추하게 만들고, 최종 레이어가 완성되기 까지 소요된 시간과 그로부터 창출된 화면의 깊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렇게 눈앞에 걸려있는 정하슬린의 그림은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은 지점까지도 상상하게 만들며 그림의 비평적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간다.
(1)케이크와 웅덩이는 무관한 듯 보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레이어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케이크의 경우 시트와 과일, 크림, 토핑이 겹겹의 레이어를 형성하며, 웅덩이의 경우 표면에 비치는 대상(그것은 하늘이 되기도 풍경이 되기도 혹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이 레이어를 형성한다.